Nov 19. 2003 | 11월 22일까지 사간동 갤러리편도나무에서 ‘한바람 임옥상의 가을이야기’ 전이 열린다. 1980년대부터 민중미술 현장에서 활동한 임옥상은 1999년부터 4년 간 매주 일요일마다 대중참여예술프로그램 ‘당신도 예술가’를 진행해왔다. 통산 14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예술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가 일련의 삽화작업으로 표현된 결과물을 보여준다. 전시된 작품은 유경환의 그림동화 〈빗방울〉 삽화 16점, 황석영의 장편소설 〈심청, 연꽃의 길〉 삽화 51점, 전태일의 삶을 모티브로 한 김정환의 소설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웅진북스) 삽화 35점 등 총 102점이다. 흔히 삽화라면 종이 위에 그려진 조그만 그림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닥 펄프로 만든 종이부조나 흙 부조란 점이 눈길을 끈다.
삽화-작지만 가볍지 않은 세계
1981년 첫 개인전 이래로 제국주의를 비판한 ‘아프리카 현대사’(1988)전, 흙 부조작업을 중심으로 선보인 ‘일어서는 땅’(1995)전, 매향리에 버려진 포탄껍질에 스푼과 나이프로 날개를 단 조형물이 등장한 ‘철기시대 이후를 생각한다’(2002)전 등 전시마다 그가 즐겨 다룬 재료는 조금씩 변해왔지만,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저부조 작품은 평면성을 유지하면서도 미묘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임옥상이 작품활동 초기부터 즐겨 사용했다. 대형작품 위주로 제작된 그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전시장에 걸린 앙증맞은 크기의 작품들은 낯설지만, 그림 한 장 한 장마다 원작의 이야기가 압축돼있다.
삽화의 원본인 소설의 면모도 눈길을 끈다. 예컨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시인 김정환이 시나리오와 소설을 접목시킨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의 경우, 1960년대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시점부터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기까지의 각 장면을 다뤘다. 노동자들이 지친 몸을 간신히 누이던 벌집방, 허술한 종이로 메뉴를 써 붙인 선술집, 가난한 남녀가 찾아들던 남루한 여관은 손바닥만한 부조 위에 되살아난다. 추상적일 수도 있는 장면을 이처럼 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역시 작가가 리얼리즘에 기반한 민중미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흙의 물성이 전달하는 민중의 잠재력은 작은 그림 속에 용솟음친다.
소설 속에 되살아난 심청과 전태일
한편 11월 말 문학동네 출간을 앞두고 있는 황석영의 한국일보 연재소설 <심청, 연꽃의 길>을 모티브로 한 일련의 삽화들은 19세기 동아시아 여성이 겪는 매춘의 역사를 유교적 효 관념의 희생양인 ‘심청’에게 대입시켜 보여준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심청은 바다에 빠졌다가 환생하기는 하지만, 독특하게도 렌화(蓮花)라는 이름으로 중국 땅에서 홍등가에 팔려간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유린된 여성이 진흙탕 같은 삶을 이겨나가는 모습이 삽화에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손바닥 크기서부터 그림책을 펼쳐놓은 것 만한 크기의 삽화들은 1백만 원 안팎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어 평소 임옥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욕심을 내볼만하다. 출품작은 2004년 그림다이어리 《한바람 임옥상의 가을이야기》(명상)로도 출간돼 실용성을 더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카페 겸 전시장이라는 특성을 살려 자정까지 문을 열어두고 있다. 깊어 가는 겨울밤, 좋은 사람과 더불어 차 한잔 마시며 그림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다. 문의전화 02-3210-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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