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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회화로 그려낸 한국근현대사 - 신학철

by 야옹서가 2003. 12. 3.

 Dec 03. 2003
| 암울한 한국근현대사의 현장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정밀한 시각으로 포착해온 민중미술가 신학철의 통산 4번째 개인전 ‘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像)’ 전이 열린다. 12월 21일까지 동숭동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대표작인 한국근현대사 연작은 물론, 1960년대 아방가르드 예술에 심취했던 미술학도 시절의 오브제 작품부터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총 120여 점을 아우른 대규모 회고전이다.

영적인 불꽃처럼 솟구치는 민중의 힘
이름 없는 일개 필부는 물론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 군부독재정권의 수장, 민주화투쟁 열사 등 한국근현대사의 부침을 담은 수많은 얼굴이 때로는 뒤엉켜 반목하고, 때로는 살을 섞으며 인간의 탑을 쌓는 신학철의 한국근현대사 연작은, 1980년대 한국민중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주요 작품 중 하나다. 투박하리만큼 정직한 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린 신학철의 그림은 작은 것들의 힘이 모여 만든 장엄한 풍경이다. 그림의 일부만 떼어내서 보았을 때에는 사실적이고 평범한 인물화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수없이 겹쳐져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면서 ‘민중’의 역사를 담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환골탈태한다.

이 불덩어리는 종종 그로테스크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일그러진 한국근현대사의 초상이라고 할 만한 그 ‘괴물’의 몸 속에는 현대산업사회를 지향하면서 소외된 농촌의 현실과 소비지향적인 도시인의 모습이 교차하고, 얻어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진 시민의 얼굴과 총검에 가슴을 찔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청년, 그리고 그들을 억압했던 공권력이 충돌한다. 이들이 서로 부딪치고 화합하면서 표출한 ‘변화에 대한 욕구’가 수직적으로 확장되면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연작은 마치 영적인 불꽃처럼, 혹은 나무처럼 위를 향해 솟구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체의 합이 얼마나 큰 시각적 충격을 주는지 증거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제1전시장의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1999-2002)를 꼽을 수 있다. 120호 캔버스 16점 위에 펼쳐지는 이 작품은 그 길이만 20여 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 1991년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작가전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내놓은 작품답게 그 규모가 장대할 뿐 아니라, 기존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수직적 구도로 펼쳐졌던 민중의 역사가 파노라마 사진처럼 좌우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 증거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왼편부터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신학철로 하여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난을 겪게 한 그림 ‘모내기’의 농부 모습부터 시작해 평범한 사람들의 대명사 ‘갑돌이’와 ‘갑순이’가 거대한 형상으로 등장하며, 우측으로 시선이 나아갈 수록 현대사의 격랑 속에 민중의 모습이 뒤엉키고, 이들을 억압하는 힘과 기계문명에 먹혀버린 붉은 빛 덩어리의 모습으로 맺음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신학철이 그동안 그려온 모든 형상들이 총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에 들어간 사진과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작가는 ‘갑순이와 갑돌이’ 도해공간까지 마련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앨범 재킷, 사진, 신문·잡지 기사, 영화 포스터 등을 확대복사하고 사진콜라주해 만든 밑그림과, 그가 모티브를 가져온 원본이 함께 전시돼 작가의 제작의도와 과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제 2전시장에서는 기존의 전시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던 신학철의 초기작, 즉 일련의 오브제 작품과 사진콜라주 등 그의 작품세계의 시발점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특히 이념논쟁이 수그러든 21세기에 그가 화두로 삼는 주제가 이라크 전쟁임을 주목하게 된다. 순교자처럼 흰옷을 입고 두 팔을 벌려 십자가처럼 선 작가 자신의 가슴팍에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이 담긴 과녁이 그려진 ‘자화상’(2003) 등에서 외침과 같은 느낌의 전작과 달리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변화한 그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모내기 방’으로 명명된 소갤러리에서는 작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1987년 작 ‘모내기’와 관련된 자료 및 동료 작가들의 찬조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모내기’는 백두산 기슭 아래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북녘 농민과, 밭 가는 남한 농부가 외래문물들을 쓰레기처럼 남해안 쪽으로 밀어내는 장면을 대조시킨 장면이 ‘북한을 찬양하고 남침을 정당화하는 그림’이라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작가를 곤경에 빠뜨렸던 문제작이다.
1999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현재까지도 유엔인권위원회에 계류중인 ‘모내기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작가의 작품이 겪어온 부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다. 주말 오후 2시에는 작품 설명회가 열리며 토요일 오후 3시에는 체험학습 시간을 마련해 관람자의 이해를 돕도록 했다. 문의전화 02-760-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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