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묘미 중 하나는 약간만 상황이 달라져도 전혀 다른 어휘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술이라는 단어 하나도, 어떻게 마시는지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해 마신 술은 배움술, 멋으로 마시는 술은 멋술이 아니라 맛술, 맛도 모르고 마시는 술은 풋술이라 한다.
한술 더 떠서, 멋도 맛도 모르고 함부로 들이켜는 술은 벌술, 보통 때는 안 먹다가도 입만 대면 한없이 먹는 술은 소나기술,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은 강술이라 한다. 모꼬지다, 신입생 환영회다 술 마실 일이 늘어난 요즘, 술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벌술, 소나기술, 강술 따위는 아예 시작도 말아야겠다.
앞서 소개한 술 이름들은 모두 장승욱의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하늘연못 펴냄)에 수록된 우리말이다. 이 책에는 우리 토박이말 4,793가지의 뜻과 사용 실례가 생활, 세상, 사람, 자연, 언어의 다섯 가지 유형별로 소개되어 있다.
‘사금파리와 이징가미, 어정과 살손, 조잔부리와 초다짐, 앙가슴과 대접젖’과 같이 서로 밀접한 관계의 단어를 짝지어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의미의 폭을 확장시켜나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단순히 우리말과 뜻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칠맛 나는 수필처럼 풀어 쓴 필력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김치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처녀김치가 없으므로 영원히 총각 신세를 면할 가망이 없는 총각김치도 있다. 총각무로 담근 김치가 총각김치, 총각김치로 찌개를 끓이면 총각김치찌개, 총각의 악순환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홀아비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그러면 김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는 김치는? 그야 물론 ‘기무치’다.”
주제별로 묶은 우리 토박이말 사전
이 책에서 굳이 단점을 잡아내자면, 각 단어들이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권말부록 형식의 ‘꼬마 말모이’ 속에 앞서 언급된 단어들을 사전 형식으로 수록하긴 했지만, 본문의 주제별 분류는 깨어지기 때문에 불편함이 따른다.
이런 점이 못내 아쉬운 사람이라면, 박남일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서해문집 펴냄)이 유용하겠다. 우주와 자연, 생물과 사물, 사람과 사회, 경제활동, 일상생활과 문화의 총 5부로 구성된 분류 방식은 앞의 책과 유사하지만, 실제 사전처럼 단어의 간략한 뜻, 예문까지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어 ‘우리말 사전’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이를테면 ‘달’이라는 항목 아래에는 ‘갈고리달, 달가림, 달무리, 달물결, 달편, 손톱달, 어스름달, 으스름달’과 같이 관련 어휘가 가나다순으로 나란히 놓인다. 이 중에서 ‘갈고리달’ 부분을 찾아들어가 보자.
“갈고리달-몹시 이지러진 달. 초승달이나 그믐달.”
이렇게 그 뜻을 ‘한줄 요약’하고, 다시 이를 풀어 설명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손톱달’이라 하고 또 어떤 지방에서는 갈고리달이라고 하였다.(…)갈고리달은 아무래도 조금 험악한 느낌을 주는 반면, 손톱달은 친근하고 앙증맞은 느낌을 준다.”
마지막으로는 “한밤중에 뒤척이다가 뜰에 나와 보니 우듬지에 걸린 갈고리달이 처연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와 같이 실용 예문으로 마무리했다.
글맛은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에 못 미치지만, 실제로 특정 상황에 해당되는 단어를 찾아 쓰고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더 실용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어휘 수를 늘리는 것이 말글살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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