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치중한 개론서를 넘어, 사진의 본질을 바라보는 인문학적 시각을 접하고 싶다면 <카메라 루시다>를 권한다. 저작권 문제로 1999년 말 절판된 이 책은 현재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 없지만, 동문선에서 롤랑 바르트 전집의 저작권 계약을 이미 체결해둔 상태여서 조만간 재출간될 예정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의 마지막 저작이다. 이 책은 크게 보아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의 본질을 치밀하게 탐구하는, 비평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진론’이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며 삶과 죽음의 비의를 이야기하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리처드 아베돈, 펠릭스 나다르, 로버트 메이플소프, 앙드레 케르테즈 등 시대를 풍미한 대가들의 사진을 교차시키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온실 사진’을 매개로 사진의 본질은 곧 죽음임을 설파한다.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면서 피사체가 기록된 순간은 마치 그가 속한 시간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 포착된 시간은 뷰파인더에 갇혀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진 속에서 되살아나 영원한 삶을 얻는다. 바르트는 사진 속에 담긴 역설적인 영원성,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재생에 주목한다. 결국 사진은 부재하는 현실의 존재 증명이며, 노에마(Noema), 즉 그것이 이미 존재했다는 불변의 증거로 남겨진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사진에 내재된 두 개의 가늠자
바르트는 이 책에서 사진 속에 내재된 두 개의 상반된 가늠자를 제시한다. 스투디움(studium)과 대조되는 푼크툼(punctum)을 설명하는 이 대목은 <카메라 루시다>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다.
일종의 보편적인 문화적 기호로서 작용하는 스투디움은 “누구에게나 세련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생기는 없는” 사진들의 속성을 보여준다. 스투디움이 지배하는 사진은 이를테면 기술적으로 잘 찍은 관광엽서 류의 사진이나 보도사진 같은 것이다. 보았을 때 잠시 경탄하거나 흥미로워할 수는 있지만,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지는 못한다.
이에 반해 라틴어로 ‘작은 점, 상처’를 뜻하는 푼크툼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과정을 거쳐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이다. 푼크툼은 누군가에게는 “보는 이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통찰의 순간을 이끌어내지만, 그와 교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메시지도 주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바르트가 ‘온실 사진’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을 이야기하고 그 회복을 꿈꾸지만, 결국 사진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어머니와 관계없는 독자들은 사진에서 바르트가 발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객관적 정보만을 읽게 되며, 이는 의미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가에게 있어 푼크툼에 대한 질문은, 그의 영혼이 사진 속의 어떤 요소와 공명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단순히 잘 찍은 사진을 넘어, 어떤 방식과 주제로 자신만의 사진을 찍어야 할지에 대한 답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나는 어떤 사진에서 푼크툼을 감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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