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기간 짬을 내어 다음넷 블로그에 있던 글을 조금씩 갈무리한다. 이사 전날 밤까지 잡동사니를 뒤적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사람처럼, 가져와야 할 글을 주섬주섬 골라 새 블로그에 담는다. 작년 4월 catstory.kr 도메인을 구입하고도 블로그 이전을 차일피일 미뤘었다. 이글루스는 2003년부터, 다음넷 블로그는 2005년부터 써 왔으니 이런저런 추억도 있고, 그전의 블로그가 폐가처럼 방치될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질 것 같아서다. 뭔가를 내 손으로 끝내야 할 때면 늘 그런 기분이 든다.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틋한 느낌.
오늘은 2006년 여름 무렵 만들었던 길고양이 엽서들을 가지고 왔다. 스킨으로 썼던 이미지를 버리기가 아쉬워서 짧은 글을 붙여 블로그에 올리면서 엽서라고 불렀다. 길고양이 엽서는 아홉 장에서 일단 멈췄지만, 그걸 본 사람들이 길고양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됐고, 나중에 단행본으로도 제작됐으니 헛된 노력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냥 버려두고 오기엔 아쉬움이 남아서 한 자리에 옮겨놓는다.
첫 번째 엽서 | 검은 거울
두 번째 엽서 | 박하사탕 같은 숲
"초록과 회색 등이 어우러진 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두 고양이의 모습도 평화로워 보이고 눈이 화-- 해 집니다. 박하사탕 물었을 때처럼..." 성미산인 님께서 교감게시판에 남겨주신 글인데, 마음에 들어서 퍼왔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박하사탕처럼 청량함이 느껴지는 사진이었으면 좋겠군요.
세 번째 엽서 | 생각하는 고양이 |
사진을 찍을 때 고양이는 골목 어귀에 납작 드러누워 있다가, 귀찮은 인간이 자꾸 얼쩡거리는 게 싫은지 소화전 밑으로 슬그머니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고양이 얼굴이 보이는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었죠. 고양이가 턱을 괴거나 팔짱을 끼고 뭔가 깊이 생각하기라도 하듯 어딘가를 응시할 때, 그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고양이가 얼마나 아름다운 동물인지 말이예요. 그런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맙니다. 내가 고양이의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네 번째 엽서 | 고양이 이마의 불꽃 무늬
안국동에서 자주 만나는 황토색 호랑무늬 고양이. 비슷한 무늬의 고양이 서너 마리가 함께 무리지어 자동차 밑에 앉아 있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 마리만 눈에 띄었습니다. 가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매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다른 황토색 고양이들은 동네 사람이 놓은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무리 중에서 혼자 살아남은 황토색 고양이의 이마에는, 만화 '피구왕 통키'의 주인공이 필살기를 쓸 때 그라운드에 나타나는 것과 닮은 불꽃 무늬가 돋아나 있습니다. 한번은 그 무늬가 도드라지도록 가까이서 사진을 찍었는데, 누군가 그 사진을 보더니 '용사의 낙인' 같군요, 라고 하시더군요. 길고양이에게는, 도심에서 하루를 무사히 넘길 먹잇감과 잠자리를 구하는 매 순간이 투쟁이니까요.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녀석들은 다르지요. 동물의 삶이 때로 인간의 삶보다 치열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를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 관계 없이 세상에 떨궈져 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혹은 만들어갈 지는 결정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데 그치지만, 누군가는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 싸웁니다. 노예로 사느냐, 주인으로 사느냐는 이 지점에서 갈리게 됩니다.
벽 가까이 몸을 붙이고 당당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황토색 고양이를 다시 바라봅니다. 웬만한 일에는 수염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저 표정을 지을 수 있기까지, 길고양이는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해 왔을까요? 사람들은 그런 길고양이의 얼굴을 보고 '무슨 고양이가 저렇게 겁도 없냐'고 말하지만, 저는 그들의 담대함을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섯 번째 엽서 | 물고기? 고양이? |
사진 찍던 날은 초여름 날씨, 해는 한가운데 떠서 뜨끈뜨끈했지요. 고양이 그림자만 물고기처럼 매끈매끈 시원하게 보이기에, 그림자에 초점 맞춰 찍어봤습니다. 쑥 잘 빠진 그림자가 물고기처럼 꼬리를 휙휙 내두르며 공기 속으로 쏜살같이 나아갈 것만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잠시나마 시원해졌습니다.
여섯 번째 엽서 | 힘내라, 아깽이!
종각역 근처 포장마차 옆에서 뭔가를 열심히 주워 먹고 있던 고등어 무늬 아깽이입니다. 이제 한 5개월쯤 되었으려나. 자그마한 덩치지만 꼬리는 기개 있게 바짝 세웠네요. 사진 속에는 안 보이지만, 바로 옆에 나이 지긋한 삼색 고양이가 식빵 자세로 앉아 있다가, 제가 다가가니 후두둑 달아나버렸습니다.
여름은 길고양이들이 한창 번식하기 바쁜 계절입니다. 아깽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른 길고양이들이 유독 눈에 띄는 철도 이때입니다. 바람이 따끈따끈한 봄날, 나른해진 고양이들이 사랑에 빠지기 쉬운 계절이 지나고 수확(?)의 계절인 여름이 돌아오기 때문이죠.
열매처럼 아깽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의 모습은 자못 당당하지만, 도심에서 어미와 새끼 고양이가 안도하며 쉬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간혹 멋모르고 사람을 따르던 고양이들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척추나 다리를 다쳐 평생을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이런 고양이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고양이 동호회 회원들에게 발견되면, 입양게시판에 사연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동을 할 수 없거나 대소변도 가릴 수 없는 중증 환자 고양이들은 장기 입양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길고양이들을 좋아할 수 없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곱 번째 엽서 | 길고양이, 레이저 발사!
야간운전을 할 때 어두운 도로가 잘 보이도록 도로에 설치한 장치를 가리켜 '고양이 눈(cat's eyes)'라고 부른다지요. 이 장치에 헤드라이트가 반사되면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나기 때문에, 불빛을 비추면 특유의 안광을 내는 고양이 눈과 꼭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밤에 길고양이를 찍기란 꽤 곤란한 일입니다. 카메라의 감도를 높여 찍으면 금세 노이즈가 자글자글해지거든요. 외장형 스트로보를 쓰면 낫긴 하지만,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길고양이를 찍는데 언제 그걸 끼우고 있답니까. 이런 때는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일단 찍고 보는 게, 한 장도 못 찍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밤길을 가다가 우연히 고양이를 만나 황급히 사진을 찍으면, 꼭 저렇게 동공이 하얗게 찍힙니다. 무슨, 순정만화에서 깜짝 놀란 주인공의 표정같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길고양이를 발견하고 나서 그 녀석이 화단 너머 풀숲으로 사라질 때까지 2~3분의 짧은 시간 동안, 2장의 사진을 건졌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잡초들이 무성해진 화단에 서 있는 고등어 무늬 고양이의 모습에 숲고양이의 느낌이 잘 살아나서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도 말이지요.
여덟 번째 엽서 | 넘을 수 없는 선
고양이 두 마리가 한참동안 대치 상태로 앉아 있습니다. 아까 젖소 무늬 녀석이 고등어 무늬 고양이의 등을 호되게 때렸거든요. 졸지에 얻어맞은 고등어 녀석은 화났는지 놀랐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젖소 녀석의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대리석 바닥에 줄지은 검은색 띠를 보니, 책상 한가운데 금 하나 긋고 "넘어오면 죽~어!" 하고 짝궁에게 윽박질렀던 초등학생 시절이 생각나네요. 녀석들이 열심히 눈싸움을 하건 말건, 무심한 행인은 두 마리 고양이를 가로질러 바쁜 걸음을 재촉합니다. 사람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상관 않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녀석들이 왠지 귀엽습니다.
아홉 번째 엽서 | 잡음 들리는 날
아무런 가구도 조명도 없는, 작고 어두운 방을 상상해 보세요. 방 한구석에 낡은 텔레비전이 놓여 있고,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에서 새어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바닥을 흐릿하게 비춥니다. 평소라면 그런 빛이 무섭게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막막한 어둠 속에서는 그조차도 위안이 됩니다.
오래된 텔레비전 화면처럼, 마음 속에서도 칙칙 잡음이 들릴 것 같은 그런 날에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초점도 맞지 않고 어두운데다가 고양이도 끄트머리에 조금만 나왔지만 사진은 버리지 못했어요. 감정이입이 된 사진을 버리는 건 내 일부를 잘라내는 것 같으니까요.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면 블로그 스킨을 짙은 색으로 바꿉니다. 그럼 우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마음이 조금 차분해집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바닥을 쳐야 다시 올라올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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