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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 담은 올망졸망 돌멩이그림-황주리 ‘세월’전

by 야옹서가 2005. 9. 5.
[미디어다음/ 2005. 9. 5] 명색이 문화의 거리인 인사동. 정작 붐비는 곳은 찻집과 호떡집뿐이라지만, 요즘 사람들이 유독 발걸음을 멈추고 쉬 자리를 뜨지 못하는 곳이 있다. 바로 황주리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 아트사이트 앞이다. 전시장 바닥에 올망졸망 놓인 100여 개의 돌멩이가 저마다 아기자기한 그림을 품고 있으니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오는 13일까지 열리는 황주리의 25번째 개인전 ‘세월’ 출품작 중 ‘돌에 관한 명상’ 연작을 만나본다.

흔히 입체작품은 높은 좌대 위에 올려져 전시되기 마련이지만, 황주리의 돌 그림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바닥에 놓여있다. 미술작품이 갖는 권위를 벗어던지고, 흔연스럽게 바닥에 철퍼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돌멩이 그림들은 오손도손 정겹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파란만장한 우리네 인생처럼 각양각색이다. 크게는 사람 머리만한 것부터 작게는 어른 손바닥만한 것까지, 무엇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포옹하는 사람, 길 떠나는 사람, 꿈꾸는 사람, 외로운 사람…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묘사된 인간 군상은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삶과 꿈을 모자이크 하듯 보여준다.

그런데 돌 위에 그려진 그림의 세부에서 시선을 돌려 돌 전체를 바라보면, 알록달록한 그림 사이로 사람 얼굴 형상이 보인다. 살포시 감은 눈, 도톰한 입술이 그림 사이로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려져 있다. 하나의 돌이 한 폭의 캔버스인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정형화된 캔버스를 벗어나 독특한 재료에 그림을 그린 것이 처음은 아니다. 1986년 작 ‘가면무도회’에서는 원고지에 얼굴 그림을 그려 다닥다닥 이어 붙였다. 2003년 열린 ‘안경에 관한 명상’ 전에서는 10여 년 간 모은 수백 개의 안경에 그려 전시장 벽면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번에 화폭 대신 선택한 것은 돌멩이다.

원고지, 안경, 돌멩이라니 전혀 무관해보이지만, 모두 긴 세월과 인생을 상징하는 재료들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흔히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나올 것”이라 눙치듯, 한 사람의 얼굴은 그의 삶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원고지와도 같다.

또한 세상을 보는 창 역할을 하는 안경은 신체의 일부분과 동일시되어온 사물로, 무한대를 표시하는 기호 ∞와도 닮아 있어, 세월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반영하는 데 적합한 재료였다.

‘세월’을 명제로 한 이번 전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돌멩이 역시 무한한 시간을 상징한다. 처음엔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녔을 돌멩이가, 물에 깎이고 바람에 풍화되어 둥글둥글 원만한 모습으로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작가는 그 무한한 시간이 응축된 정수로서의 돌멩이에 주목하고, 유한한 인간의 삶을 그려 넣어 대비 효과를 극대화했다.

세월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되, 마치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속닥속닥 털어놓는 친구의 귀엣말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황주리 그림의 매력이다. 이는 전시장 밖 쇼윈도에 삼삼오오 몰려들어 떠날 줄 모르는 일반 관람객의 모습에서도 증명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돌에 관한 명상’ 연작 외에도 4년째 동고동락해온 불독 ‘베티’를 의인화한 자화상 연작을 비롯한 모노톤의 평면 회화가 함께 전시된다. 작가가 개인전에 맞춰 펴낸 그림에세이집 ‘세월’(이레)에서도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전시 관람료는 무료. 문의전화는 02-725-1020.

황주리는 “지나가는 모든 순간들은 꿈처럼 덧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듯한 똑같은 일상은 기억나지 않는 꿈속의 장면을 닮아 있다. 나는 그 꿈을 찍는 사진사가 되고 싶다”고 썼다. 그의 말을 가장 잘 압축한 작품이다.

식물학’ 연작에서 펼쳐보였던, 꽃 모양 프레임에 이야기를 담은 형식이 돌멩이 그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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