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5. 2003 | 우리 주변의 공간은 저마다 특유의 냄새를 갖고 있다. 찻집만 해도, 이를테면 전통찻집에서는 은은한 계피향이,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선 갓 간 원두 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다방이라면 눅눅한 아저씨 냄새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딘지 모르게 낙후된 공간처럼 느껴지는 다방은, 그러나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청춘남녀가 북적였던 문화공간이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에서 시 낭송회가 열리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람들은 김민기나 한대수의 금지곡에 귀를 기울이거나, 외국 가수들의 노래를 ‘빽판’으로 들으며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냈다. 이종환이 종로 쉘부르 다방의 간판스타였던 시절, 가수들은 음반을 내면 방송국보다 영향력이 컸던 음악다방을 돌며 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실체와 환영 사이의 간극 이용한 영상작품
10월 31일까지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는 이처럼 잊혀진 다방문화의 기억을 되살리는 김창겸의 ‘사루비아다방’전이 열린다.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이태리 까라라 아카데미 조소과를 거쳐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김창겸 씨는 통산 5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뒤엎는 영상설치작품 3점과 다큐멘터리 1점을 선보였다. 사루비아다방 역시 예전에 문인과 예술가들이 자주 찾던 다방 공간을 활용한 전시장인지라 이번 전시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전시장에서는 여느 다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이 늘어서 있다. 다방마담에게 연심을 품은 누군가 슬쩍 건넸을 말린 꽃다발, 비단잉어가 한가롭게 노니는 큰 어항, 꽃무늬 프린팅의 테이블, 맨 위에는 금박 글씨로 ‘축 발전’이라고 써 있고 온갖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은 거울……. 거울 앞에서는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고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그런데 다방 풍경을 비추는 2차원적 영상 속에서 일부가 마치 스크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듯 두드러져 보인다. 관람자가 입체 안경을 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까?
그 비밀은 약 7분에 달하는 작품 상영이 끝날 때 밝혀진다. 프로젝터의 불이 꺼지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처럼 흰 오브제만 덩그러니 남는데, 석고로 오브제를 먼저 제작하고 그 오브제와 똑같은 형상을 촬영한 영상을 비춰 3D영상 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우리가 실제라고 믿고 보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환영임을 주지시키는 김창겸 작품의 독특함은, 진짜처럼 생생했던 사물이 실은 비춰진 영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게 하는 ‘시간차 공격’에서 나온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스크린 역할을 하는 다방 거울 앞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버랩 될 때마다 거울 속에 비친 내용물이 스르륵 바뀐다. 다방 거울의 금박 틀이 갈색 틀로 변하고, 거울 속에 처음과는 다른 실내풍경이 비치는가 하면, 방금 전까지 어항 속에 들어있던 비단잉어가 주르륵 물 따르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는 일이 반복된다. 이처럼 초현실적인 장면전환도, 그림이 아닌 영상작품이기에 가능하다. “지금 사라지는 너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지는 작품 속 화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해온 다방의 모습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다방의 추억 - 우리가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이밖에도 다방 소파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홍수환 선수의 타이틀매치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림자로 연출한 또 다른 작품은, 종종 TV중계석 역할까지 맡았던 옛 다방의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비단 권투경기 중계 뿐 아니라 민주화항쟁 영상자료, 붉은악마들의 월드컵 응원 모습 등을 교차시키며 과거의 다방문화와 오늘날의 광장문화를 교차시킨 것이 눈에 띈다.
또한 옛날의 다방문화를 기억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와 지금 남아있는 다방들의 모습을 교차시키는 다큐멘터리 작품도 흥미롭다.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2003년 1월부터 서울 변두리와 의정부, 동두천, 파주, 문산, 광주 등 경기도 일대를 돌며 다방 사진과 비디오를 찍으며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잠자리날개 같은 한복을 입은 다방마담의 고운 자태를 잊지 못하는 가수 최백호 씨, 다방에서 겉멋 부리던 젊은 날을 회상하는 전직 권투선수 홍수환 씨 등 유명인사부터, 오늘날의 모닝커피와 달리 옛날에는 계란노른자를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모닝커피’로 아침 시장기를 달랬다는 다방종업원의 인터뷰까지 흥미로운 내용을 접할 수 있다.
본 전시의 부대행사로 10월 29일 오후 4시에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후 7시까지다. 자세한 문의는 02-733-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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