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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에서도 결혼은 ‘로또’였다-<오만과 편견>

by 야옹서가 2006. 5. 13.
최근 문학 베스트셀러 동향을 보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소설 ‘오만과 편견’(민음사)이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다. 1813년 처음 출간됐으니 무려 200년 가까이 묵은 소설인데, 왜 이 책이 새삼 인기를 끄는 걸까? 물론 이런 기현상은 한 달 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덕분이지만, 원작 소설의 매력에 힘입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18세기 영국 남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만과 편견’은 결혼을 일종의 ‘로또’로 여기는 당시 사회 풍조를 적나라하게 전하면서, 남녀가 사랑에 빠질 때 겪는 시행착오와 내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부유하고 오만한 귀족 남성 다아시와, 평범한 집안의 딸이지만 총명하고 강단진 엘리자베스 베넷이 티격태격하다 결국 결혼에 이르는 설정은 언뜻 진부하게 보인다. 그러나 대립적 관계를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두 사람은, 정략결혼이 만연했던 18세기 영국에서 드물었을 진짜 연애의 과정을 보여준다. 적어도 신데렐라 스토리의 전형을 무조건 답습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다아시는 친절하고 사려 깊지만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 또는 낯선 이들에게 냉정한 단점을 지녔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처음 청혼할 때조차 거절을 예상치 못할 만큼 오만했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현명하고 주관도 뚜렷하지만,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이를 진리로 믿는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다아시의 진심을 읽지 못하고 차갑게 대하기만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만나는 동안 다아시는 계층에 따라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 잘못임을 깨달으며, 엘리자베스 역시 첫인상과 소문만으로 한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었는지 인정한다.

연애담 속에 숨은 결혼의 진실
삐걱거리면서도 서서히 숙성해가는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연애담 못지않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의 생생한 묘사 또한 이 책을 읽는 재미다. 특히 결혼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기는 조연급 등장인물들의 추태는, 연애소설의 외피를 뒤집어 쓴 이 소설의 비판적 시각을 은근슬쩍 보여준다.

예컨대 부자 총각만 보면 어떻게든 다섯 명의 딸 중 하나와 엮어보려고 안달하는 베넷 부인의 천박함은, 뚜쟁이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베넷 집안의 친척 콜린스가 엘리자베스에게 결혼을 거절당하자 ‘꿩 대신 닭’ 격으로 샬럿 루카스에게 청혼하고, 샬럿 역시 돈만 보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장면 역시 가관이다.

결혼에 관한 집착은 귀족 집안도 별다를 바 없다. 베넷 집안의 첫째 딸 제인을 사랑하는 오빠의 마음을 알면서도 미천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빙리 양, 조카 다아시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가문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던 캐서린 영부인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이 외적 조건만 보고 덤벼드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만큼, 이 시대의 결혼관에 대해 고민해본 이들이라면 ‘오만과 편견’ 역시 유쾌하게, 혹은 뜨끔해하며 읽게 될 것이다.

사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처럼 시대와 무관하게 읽히는 작품도 드물다. 이는 청춘남녀의 영원한 화두인 연애와 결혼 문제를 발랄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헬렌 필딩의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역시 ‘오만과 편견’을 21세기식 로맨틱 코미디로 재구성했다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연애소설의 달인인 오스틴은 정작 41살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노처녀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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