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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슬견설

by 야옹서가 2006. 5. 18.
평소 내가 은신처로 삼는 동굴이 하나 있다. 동굴 밖에는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거인들이 우글거린다. 나는 거인의 손이 미치지 않는 동굴 안쪽으로 깊이 숨는다. 거인들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동굴 문을 큰 바위로 막아버린다. 공기도, 물도, 먹을 것도 유입되지 않는 동굴 속에서 나는 천천히 죽어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서 '나'는 길고양이이고, '동굴'은 OO맨션이다. 맨션의 지하 변전실에 얼마 전부터 길고양이가 살고 있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나 맨션 주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급기야 주민들은 길고양이가 숨은 변전실의 고양이 통로를 철판 용접으로 막아버렸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길고양이들은 그 속에서 생매장될 것이다. 스무 군데가 넘는 변전실 중 3분의 1 정도가 폐쇄된 상태이며, 조만간 남은 변전실에도 같은 조치를 취할 거라고 한다. 아직도 맨션 대표자들의 입장은 강경하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길고양이와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보기 싫고 불편해서, 잡아들여도 그들이 인간에게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으니 마구잡이로 잡아죽이거나 죽음을 방조하는 건 분명 옳지 않다.

주말에는 몇몇 단체가 모여 침묵시위를 할 예정이라지만, 이런 경우 침묵시위가 그리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데, 길고양이 문제의 경우, 대개 주민들의 이익과 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순히 인도적인 이유만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도 어렵다.  길고양이가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유익한 점에 대해 설명하는 편이 그나마 도움이 된다.

길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전단지 초안이 메일로 왔기에, 월요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수정해서 보냈다. 이미 인쇄는 끝났지만, 본문 외에 여분의 공간이 있었다면, 이규보의 '슬견설'을 함께 싣자고 말하고 싶었다.  오래된 글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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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견설'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悽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慘酷)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火爐)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손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微物)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必然)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 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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